예명은 진화하는 중
등록자:        등록일:2009-10-23        조회수:13902

예명은 진화하는 중


 


본명 대신 사용되는 사진가들의 예명은 대부분 쉽게 불리고 기억되는 이름으로 지어진다. 그래서 단번에 작가를 각인시키는 효과를 준다. 여기에 예명은 사진작업의 내용과도 깊은 관련이 있어 작업을 설명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예명을 사용하는 사진가는 흔치 않았다. 작가 층이 얇아 굳이 예명을 쓰지 않더라도 자신을 알리는데 별다른 장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젊은 사진가들이 대거 등장하고, 이들이 선보이는 사진작업이 개념적이면서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기 시작하면서 점차 차별화의 필요성이 높아졌다. 이런 점에서 예명은 짧은 시간에 작가와 작업을 동시에 각인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주로 작가의 삶의 철학이 담겨 있던 예명의 의미 역시 작업을 보다 직접적으로 설명하거나 강렬한 인상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변하는 중이다.



이단(李丹)은 불상에 자신의 신체를 조합시킨다. 그는 이단(異端)으로 치부되는 몸을 드러내는 행위를 통해 개인사에 접근하고 있다.(Quantity of matter #87, 125×135cm, Digital C-print, 2008)




삶의 철학과 포부가 담긴 예명




사진가들이 쓰는 예명은 예명 자체로 작가의 삶의 철학이나 포부를 대변하는 경우와 사진작업의 주제와 더 가까이 연관된 경우 등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물결 파(波)에 이끌 야(惹)를 쓰는‘파야’(김상호)는 ‘새로운 흐름을 만든다’는 뜻으로, 사진계에 물결을 일으켜 보자는 의미에서 작가가 직접 지었다. 그는 패션모델이 꿈이었던 어머니의 소원을 이루게 하는 ‘마더 패션&픽션’과 최근에는 명품을 착용하고 냉소적이고 공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들 사진인 ‘노블레스 칠드런’으로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아라리오 갤러리의 관장이면서 전세계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계 인사 100인 중 한명으로 선정되기도 한 ‘씨킴’(CI KIM, 김창일) 역시 예명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 ‘보다’라는 의미의 ‘see’에서 발음이 같은 ‘ci’를 가져와 예명을 지었다. 그는 작가지원뿐만 아니라 씨킴이라는 이름으로 개인 사진전과 설치와 회화전시까지 다방면에서 창작열정을 내뿜는 중이다. 지난해 결혼식 이면의 어수선하고 흐트러진 모습을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전시한 ‘아수’(박재근)는 ‘(사진작업을 통해)나를 찾고(완성하고)’ 싶은 바람을 아수(我遂)에 담았다. 그는 “비교적 늦게 사진작업을 시작한 터라 항상 작업의 목적이나 삶의 철학을 잊지 않는 게 필요했다”며 “이런 점에서 예명이 도움이 됐고 사람들이 쉽게 기억하는 장점도 있다”고 말했다.


한국과 영국을 오가며 작업하는 ‘도로시 M 윤’(윤미연)은 오즈의 마법사의 주인공 도로시에서 따온 예명이다. 그녀는 9년전 처음 만든 비디오작업 ‘Play with Dorothy’를 들고 뉴욕으로 백남준을 만나러 갔지만 만나지 못하고 낙담한 채 뉴욕의 전시장을 거닐며 불현듯 예술이란 내 안에 있는 솔직한 무언가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마치 도로시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법사를 찾아가는 힘든 여행을 하지만 결국 그녀의 신발이 집으로 데려다준 것처럼 바깥이 아닌 내 안에서 예술의 의미를 찾게 해준 당시 여정을 기려 만든 예명이다. 3월초까지 ‘별빛에 취해 노는 사타’라는 의미의 전시 <사타릿(SaTARLIT)>을 가진 ‘사타’는 ‘(사진으로)다르게 사고하기’라는 뜻의 사타(思他)를 쓴다. 처음에는 ‘사타구니’라는 다소 민망한 신체 부위를 자신의 홈페이지 도메인으로 정한 뒤 이를 줄여 예명 사타를 만들었다. 그리고 사타구니는 ‘다르게 사고하기를 연구하는(究) 중(尼)’이라는 의미로도 완성된다. 그는 “민망한 부위지만 우리의 일부로 받아들이면 별 것 아니고 편안해지는 것처럼 다르게 사고하기를 통한 익숙함의 추구가 내 사진작업”이라고 설명했다.   


본명을 줄이거나 영문 이니셜을 따와 지은 예명이 굳어진 경우도 있다.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작업 중인 김도균은 ‘KDK’라는 예명으로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선 듯한 건축물 사진으로 꾸준히 전시를 갖고 있다. 패션 다큐멘터리 사진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선보이는 김경태도 본명보다는 ‘KT KIM’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인사동의 사진전문갤러리 나우의 이순심 관장은 ‘순리’라는 예명으로 지난해 첫 전시를 가졌다. 불상에 자신의 신체를 조합한 사진으로 지난해 <이단하다> 전시를 열고, 올해초 서울국제사진페스티벌에도 소개된 ‘이단’은 본명이 ‘이단비’다. 순한글 이름에서 한 자를 빼고 지은 예명이지만 한자 ‘李丹’을 써서 붉을 단(丹)이 의미하는 여성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이단이란 예명은 개인사에서 이단(異端)으로 치부되는 자신을 몸을 등장시키는 행위를 통해 개인의 역사를 작업의 원천으로 삼고 있는 작업내용과도 긴밀한 관계에 있다. 그녀는 “본명과 큰 차이가 없어 친근하게 느껴지면서 또 다른 나로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장노출로 밤바다를 촬영해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의지가 담긴 예명 간지의 사진작품.(The sea of temptation #1, 163×125cm, Digital C-print)


       


작업주제와 스타일을 대신하는 예명


 



또한 예명은 사진작업의 주제와 철학을 함축해 담고 있다. 예명 사용의 선구자격인 ‘김아타’(김석중)는 ‘나(我)와 남(他)이 모두 하나’라는 물아일체 사상에 착안한 예명을 만들었다. 그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고, 사라졌지만 여전히 존재한다는 예명에 담긴 뜻을 2002년부터 시작된 ‘온 에어 프로젝트’에서 최근의 ‘인달라 시리즈’까지 일관되게 보여오는 중이다.


복제된 수많은 자신을 등장시켜 현대인의 획일성을 조롱하는 사진을 선보이는 ‘난다’(김영란)는 무엇이 생겨난다는 의미의 난다에 여럿의 나를 복제한다는 작업개념까지 담았다. 작가가 운영하는 블로그의 이름에서 비롯된 난다는 인터넷 세상에선 또 다른 내가 만들어진다는 점에 착안해 디지털 이미지의 특성과 획일화된 취향을 언급하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 등을 유랑하며 친근한 동물사진을 찍는 ‘고빈’(Gowind, 이종선)은 사진유랑 중 만난 한 성자가 붙여준 이름을 예명으로 쓴다. 인도 신화 속에 등장하는 사랑의 신의 이름이기도 한 고빈은 ‘집착과 미련을 버리고 떠나는 멈추지 않는 바람’이라는 뜻으로, 물처럼 바람처럼 유유히 작업하는 작가의 스타일이나 사진과 잘 맞아떨어진다.


김영섭사진화랑에서 <욕망의 바다>전을 가진 ‘간지’(GHANZI, 안정희)는 장노출을 이용해 감각적인 색채의 밤바다 사진을 선보였다. 작업의 주제를 시각적으로 아름답고 우아하게 보여주려는 목적에서 ‘분위기 있는, 멋있는’을 뜻하는 일본어 ‘간지’를 예명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간절한 간(懇)에 뜻 지(志)로도 풀이되어 작업이나 삶 모두에서 멋있고 우아해지려는 작가의 간절한 뜻도 담았다. / <월간사진 2009년 3월호>


 


 
예명과 함께 작가를 상징하는 직인을 사용하는 작가들도 많다. 사진작품이나 각종 인쇄물에 낙관처럼 찍힌 직인은 사진가의 또 다른 분신이다. 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사진가 구본창, 박찬성, 윤미연, 박홍순의 직인

기사제공 : 월간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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