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100주년 맞는 고 이해선 선생
등록자:관리자        등록일:2013-07-23        조회수:5531

 

식민지시대, 사진예술 기틀 다진 1세대 사진가 



 


일본 제국주의의 민족말살정책이 최고점에 달하던 1930년, 조선 왕조 500년 영욕의 세월이 서려 있는 궁궐은 방치돼 허물어지고 잡초만 무성히 자라 왕조의 몰락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곳을 이제 막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스물여섯의 한 청년이 거닐고 있었다. 조선왕실의 후손이자 우리나라 초창기 사진가 중 한명인 고 백오 이해선(1905~1983) 선생이다. 조선 왕조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과는 8촌 사이이며, 선생의 증조부가 흥선대원군의 동생인 선생의 가계는 조선의 식민지화로 지탄과 연민의 대상이 되었다. 과거에만 안주하다 힘없이 무너진 조선 왕실은 나라를 망쳐먹은 주범 중 하나로 꼽혔다. 또 식민지화 후에도 왕실이 갖는 상징성은 여전해 늘 일제의 감시가 따라붙었고, 식민지를 고착화하려는 일제의 도구로 이용됐다.


동경미대서 서양화 전공하고 온 조선 왕실 후손
동경미술대학 서양학과를 막 졸업하고 건너온 이해선 선생은 쇠락한 궁궐 건물과 석물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회화를 전공했지만 언제 무너져 없어버릴지 모를 궁궐 모습을 서둘러 기록으로 남기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그림보다 사진이 제격이었다. 동경미대에 재학하면서 아사히 국제 살롱에 사진을 응모하기도 해 초짜 사진가는 아니었다. 당시는 막 건판사진으로 넘어오던 시대여서 국내에 사진관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할 무렵이기도 했다.
단순한 기록매체였던 사진을 예술의 표현도구로 확장시켜 한국 사진예술의 초석을 다진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평생 후학 양성에 힘을 쏟은 교육자이기도 한 백오 이해선 선생의 사진은 이렇게 궁궐 기록부터 첫발을 떼었다.
선생은 1905년 서울 가회동에서 이달용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을사늑약이 맺어진 해에 태어나, 조선이 주권을 잃어가는 과정을 목격했고,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왕실관리기구인 이왕직에 의해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며 성장기를 보냈다. 나중에 어떻게 그림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는지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당시는 그것만이 감시의 눈길에서 좀더 자유롭게 벗어날 수 있는 길이었다’고 대답하곤 했다고 한다. 일본에 유학하면서도 일본 귀족집안에서 하숙하며 여전히 자유롭지 못했고, 학교에서도 별로 말 없는 조용한 학생이었다. 동경미대는 학생들이 졸업할 때면 직접 자화상을 그리게 해 학교에 보관하는 전통을 갖고 있는데, 1990년대경 동경미대가 소장하고 있던 조선인 유학생의 자화상이 서울에서 전시를 가진 적이 있었다. 이미 고인이 된 뒤였지만, 선생이 그린 20대의 자화상도 함께 전시됐다. 일그러지고 꽉 앙다문 입술에 어두운 표정을 한 선생의 자화상은 반항아적인 기질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훗날 일제 시대를 떠올릴 때마다 ‘그 시대를 살기가 참 힘들었다’는 짧은 말 외에는 언급을 피했다.


평생 아마추어 사진가로 일관하며 사진교육에 주력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서는 일제가 주는 작위를 받지 않고, 그림과 사진에만 전력했다. 그뒤에 보여준 선생의 고집스러운 예술관은 이같이 불운한 성장환경과도 무관치 않다.
선생의 제자 중 한명인 안장헌 우리문화유산사진연구소 소장은 “백오 선생은 직업사진가가 아닌 평생을 순수 아마추어리즘을 주장하고 순수사진가로 일관해온 분”이라며 “한번도 작품을 상품으로 내놓은 적이 없고, 돌아가시기 3년전에 생전 처음 낸 사진집도 ‘후배들의 눈을 더럽힐 수 없다’며 비매품으로 나누어 줄 정도로 아마추어로서 경제적인 곤란을 감내하고 사셨다”고 회상했다. 또 초지일관 사진은 단순기록이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이를 몸소 실천하는 등 사진예술의 초석을 다졌다. 안소장은 “대상에 대한 느낌을 작가 나름대로 해석하고 표현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조형능력을 키울 것을 항상 제자들에게 강조하셨다”고 말했다. 그래서 작가의 미의식이 함축된 사진, 즉 철저히 계산된 사진만이 예술로서 가치 있다는 지론을 편 것이다. 일제 시대를 거치며 사진관의 직업사진과 함께 취미로서 사진을 시작하는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막 나타나기 시작했다. 초창기 아마추어 사진가들은 직업 사진가들과는 구분되는 조형성이 강조된 정물사진 등 새로운 영역으로 대상을 점차 넓혀가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개인적인 취향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흐름이 형성되지 않을 때였다. 이때 앞서 고민한 이해선 선생을 비롯해 우리나라 1세대 사진가들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시각과 방식에서 보다 예술적일 수 있는 사진을 고민하고 보급하려 애썼다.
1936년 현일영, 박영진, 임병기 선생 등과 함께 일본인이 주도하던 사진계에 우리나라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모임인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를 만들었다. 38년에는 백양사우회를 창립해 지도위원을 맡기도 했다. 해방 뒤에는 전국 단위 모임인 조선사진예술연구회를 창립하는 등 아마추어 사진의 저변 확대와 기반을 닦는 일에 매달렸다.
선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선생이 후진 양성에 무엇보다 큰 공을 들였다고 기억한다. 특히 쉽게 찍고 안이한 태도로 작업하는 제자에겐 추상같은 꾸짖음을 내렸다고 한다. 사진 품평회가 열리는 날이면 모두 바짝 긴장하고 품평회가 열리는 장소로 모여들었다. 사진이 성에 차지 않으면 나이에 상관없이 사진을 면상에 내동댕이치며 ‘대체 무엇을 느꼈고 무엇을 찍으려 했느냐?’는 호통이 떨어졌다. 반면 제대로 된 사진교육을 받지 못한 제자들이 물어올 때면 각자에게 더욱 필요한 부분을 세밀하게 일러주는 자상함도 보여주었다고 전한다.    





회화의 조형감각과 미의식을 사진과 접목
초창기 선생은 궁궐의 석물 사진에서도 보이듯 광선을 이용해 구성을 중요시한 사진을 주로 찍었다. 회화를 모방한 살롱사진이라는 평가도 들었지만, 서양화를 전공하며 터득한 미의식과 조형감각을 사진과 접목시킨 것이라는 해석도 내려진다.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배경이 걸림돌이 되면 배경을 제거하고 찍는 철저하게 계산된 사진이 선생의 사진이다. 그래서 빛과 구도, 배경을 한꺼번에 볼 줄 알아야하기 때문에 상당한 훈련을 필요로 했다.   
80년 첫 사진집인 ‘이해선 사진작품집’에 실린 사진 중에는 빛이 드는 창가에 선생이 아껴 키우던 분재를 놓고 뒤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사진이 실려 있다. 또 음양의 조화가 이뤄진 석물사진이나 당시의 생활을 기록한 기록사진도 같이 실렸다. 아쉬운 점은 선생이 한국전쟁 이전에 찍은 사진이 현재 한점도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전쟁이 터지자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 인민군이 사진 원판을 요구하자 모두 불에 태워버린 것이다. 30년대부터 선생이 찍어온 인물과 풍경, 정물 등 다양한 분야의 귀중한 사진이 소실돼 우리 사진사에 크나큰 손실이자, 선생에게도 쓰라린 기억이 되었다.
서양화를 공부하고 서화협회에도 가입해 있던 선생이 4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사진의 길로 접어들자 주위 화단의 무시와 따돌림을 당해야 했다. 사진을 천하게 여길 때라 예술 분야에 포함시키려는 시도 자체도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선생의 제자인 안준천 대한사협 고문은 “사진예술을 인정조차 하지 않던 척박한 풍토에서 외로운 개척자의 길을 걸어왔다”고 회고했다. 사진이 회화보다 더 실감나는 장면을 표현할 수 있다는 선생의 지론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몸담았던 화단의 냉대는 두고두고 상처로 남았다.


걸어온 업적 비해 남긴 사진이력은 간소 
해방 이후 선생은 사진가단체를 새로 꾸리고 공들여 후학을 가르치는데 정열을 쏟았다. 그러다 61년 5.16쿠데타로 모든 예술단체가 해산됐다. 그러다 64년 활동 해금령이 내려지자 다시 순수사진가들을 중심으로 한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재조직했다. 오랫동안 선생을 곁에서 지켜본 안장헌 소장은 “사진예술의 길을 혼자 외로이 개척해온 것이나, 대접받는 서양화가의 길을 버리고 푸대접을 받으며 가시밭길을 걸어온 것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며 “안국동 자택이나 모임에서 뵐 때마다 선생에겐 흐트러짐 없는 예술가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그 모습은 시대와 세상으로부터 받은 고통과 고독을 예술에 심취함으로써 잊으려는 몸부림에 가까웠다”고 되새겼다. 안준천 고문은 “선생의 사진에는 우리 민족의 고단한 삶과 어려운 생활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으려는 희망이 담겨 있다”며 “선생은 사진 고유의 특성을 최대한 발휘해 가까운 이웃들의 생활상을 원숙한 미적 감흥으로 표현하려는 작업을 쉬지 않고 해오신 분”이라고 전했다.
선생의 사진은 80년 지인들이 선생을 설득해 발간한 두권의 사진집 ‘이해선 사진작품집’과 ‘한국의 고궁’으로만 남아 있다. 전시도 고희 기념으로 1974년 열린 ‘향토 풍물 50경’이 유일하다. 우리 사진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지만 평생을 아마추어로서 자리를 지켰고, 앞에 나서기 보다는 뒤에서 후학 양성에만 전력해온 선생다운 간소한 이력이다.



미발표 기록사진집 탄생 100주년 맞아 출간
올해는 이해선 선생이 탄생한지 1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얼마전 선생의 새로운 사진집 한권이 눈빛출판사에서 나왔다. 선생의 유족이 보관하고 있던 50~60년대의 생활상이 담긴 ‘이해선 사진집-사진으로 남은 1950~60년대’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미발표 유작들이다. 선생이 안국동 저택에 머물며 서울 인근을 돌아다니며 찍은 것으로 보이는 이 사진들의 촬영지역은 서울인근과 수원으로 한정되지만, 다양한 서민들의 삶의 풍경이 담겨 있다. 눈빛출판사와 대한사진예술가협회는 “선생이 고궁 등 문화유적과 유물에 남달리 애착이 많았다는 점은 남긴 방대한 필름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시대와 삶이라는 주제에 관해서도 의외로 많은 작업을 발견할 수 있었다”며 따라서 “선생이 사진의 조형적 재현이라는 중압감 외에도 기록으로서의 사진의 가치도 상당히 중요시해온 것을 이번 사진집을 엮으며 알 수 있었다”고 밝혔다. 사후 20여년이 넘게 흘렀지만 선생의 방대한 사진작업과 궤적에 관한 평가는 이처럼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사진집 서문을 쓴 미술평론가 정진국씨는 “서구와 일본의 문물이 담긴 사진만을 구경하던 시절에 우리 것을 사진 속에서 확인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놀라운 사건이면서, 요즘 유행하는 복고적인 향토풍물 사진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래서 사진집의 50~60년대 풍경사진에서는 이전까지의 남의 시선을 통해 구경거리로서만 보여지던 사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정겨움을 만끽할 수 있다.
사진집을 펼치면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수십년 사이에 급격한 변화를 겪은 수도 서울의 옛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지금의 서울시청 건물과 덕수궁 석조전을 제외하면 이층 높이 이상의 건물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초가와 기와집으로 빼곡한 서울이 낯설기만 하다. 복원된 한강대교와 화신백화점, 동대문과 남대문, 복개되기 전의 청계천 수포교는 기록으로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 정부수립 10주년을 맞아 퍼레이드를 벌이는 사진과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한을 환영하는 인파, 한강변에서 멱을 감는 사람들은 당시 시대상황을 짐작케 한다. 마땅한 놀이시설이 없을 때여서 뚝섬이나 고궁에서 여흥을 즐기는 초중고생에서 중년의 아줌마, 아저씨 사진은 보기만 해도 미소를 짓게 한다. 또 50~60년대 아마추어 사진가 등 당시 사진환경을 짐작케 하는 사진도 수록돼 있다. 교통편이 발달돼 있지 않을 때여서 출사를 떠날 때면 버스를 대절해 수십명이 같이 움직이고, 목에는 값나가는 다양한 기종의 카메라가 주렁주렁 달려 있어 그 자체로 일반인의 구경거리였다. 이밖에 모델을 앉혀 놓고 촬영에 열심인 사진가나 사진 품평을 하고 있는 현일영 선생 등 말로만 듣던 인물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나 아쉬운 점은 선생이 사진을 찍은 시기와 장소를 명시하지 않아 눈대중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처럼 사장될 뻔한 선생의 사진이 사후 20여년이 지나 책으로 빛을 본 것처럼,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가는 불운한 운명을 타고난 한 예술가의 삶과 업적도 다시 평가받을 날을 기다려본다.    

자료제공 : 월간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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